Q #1. 다팔아마트 김 전무의 고민
'이번에는 지난번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으리.'
'다팔아' 할인점의 김용호 전무는 다시 한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팔아는 세계 10개 나라에 진출해 있는 다국적 할인점 회사. 지난해 일본시장에서 철수한 데 이어 이번엔 연 매출 6000억원을 기록 중인 한국시장에서도 철수키로 결정했다. 문제는 매각가격. 작년 일본에선 너무 헐값에 회사를 팔았다는 게 본사의 판단이다. 이번엔 반드시 제값을 받으라는 엄명이 본사로부터 떨어졌다.
문제는 협상 상대인 '절약마트'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점. 평소 돈 안 쓰기로 소문난 회사다. 다팔아 인수에 관심은 있지만, 그렇다고 후한 가격을 쳐 줄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그래서 김 전무는 절약마트가 아닌 '일등마트'를 협상장으로 끌어들이고 싶다. 문제는 몇 번 의향을 타진했지만 일등마트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 일등마트는 현재 할인점 업계 부동의 1위 업체다. 2위인 절약마트와 매출이 1조원 이상 차이 난다. 어떻게 해야 일등마트를 협상장에 끌어들일까?
# 2. 절약마트 박전무의 고민
지난달, 절약마트의 회장은 박상박 전무를 직접 불러 "최대한 깎아서 인수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아니, 다팔아가 최소 1조원을 요구하는데, 7000억원에 협상을 타결하라니. 정말 환장하겠네.' 2주 후면 다팔아 할인점 김 전무와의 협상이 시작되는데….
고민하고 있는 차에 김정보 과장이 들어왔다.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그는 박 전무에게 예전 신문기사를 하나 보여줬다.
"전무님, 다팔아의 오너 아시죠? 작년에 돌아가신. 기사에 따르면 그분이 생전에 그렇게 장학 사업에 관심이 많았답니다. 젊은 시절 본인이 너무 어렵게 공부해 사업가가 되고 난 후에는 매년 1000명의 고학생들에게 학비를 대줬다고 하네요. 아시다시피 다팔아의 회장님이 그분의 부인인데, 정보에 의하면 회장님이 이번 협상테이블에 직접 나온답니다."
김 과장의 말을 듣는 순간 박상박 전무의 눈빛이 번뜩인다. '그래, 이번 협상에 써먹을 비장의 무기를 준비할 수 있겠군!'
# 3. 협상은 시작됐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아니, 전운(戰雲)이 감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다팔아의 김용호 전무가 먼저 선공(先攻)을 날린다.
"일등마트 아시죠? 그쪽에서도 저희한테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며칠 전 일등마트의 부사장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조건만 맞으면 인수하겠다고."
절약마트 박상박 전무가 되받는다. "에이, 그럴 리가요. 일등마트는 이번 물건(다팔아 할인점)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 참, 그리고 매각 대금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십니까? 저희 회계사들이 분석해 본 결과 약 7000억원 정도로 가치가 인정되더군요."
김용호 전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친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가 정확회계법인을 통해 분석한 결과, 저희 할인점의 가치는 1조원 이상으로 추정됐습니다. 7000억원이라뇨. 이쯤 되면 협상하지 말자는 말이죠?"
박상박 전무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이고, 김 전무님. 흥분하지 마시고요. 이 자리에 귀사의 회장님도 나와 계신데. 회장님.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자료가 있는데 잠시만 경청해 주실 수 있습니까?"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양 회사간의 '전쟁'이 시작됐다. 어떻게 하면 이 협상을 한쪽은 이기고 다른 한쪽은 지는 제로섬(ze ro-sum) 게임이 아닌 양측 모두 승리할 수 있는 윈윈(win-w in) 게임으로 만들 수 있을까?
A 1. '배트나(BATNA)'를 개발하라
협상하는 법을 훈련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쉬운 방법이 있다. 바로 '배트나'를 아느냐, 모르느냐를 물어보면 된다. 협상학에서 다루는 가장 기본적 개념 중 하나가 바로 배트나이기 때문이다. 배트나(BATNA·Best Alter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란 한마디로 '이번 협상이 결렬됐을 때의 대안(代案)'을 말한다. 위의 협상 케이스로 돌아가 보자. 다팔아의 배트나는 무엇일까? 바로 '일등마트'다. 현재 협상 상대인 절약마트와의 협상이 결렬됐을 때 쓸 수 있는 대안은 일등마트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가 좋은 배트나를 갖고 있다면 이 협상은 '백전백승'이다. "당신 말고 다른 대안이 있는데요." 이 한마디로 협상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 다팔아의 김 전무는 어떻게 해서든 일등마트를 이번 협상에 참여시켜 협상의 배트나로 활용하고 싶다. 당신이 김 전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방법은 간단하다. 몸집을 불리는 것이다. 현재 업계 1위 일등마트와 업계 2위 절약마트의 매출 격차는 1조원. 만약 절약마트가 연 매출 6000억원짜리 다팔아를 인수해 봤자 여전히 1위 일등마트에 4000억원이나 뒤진다. 일등마트 입장에서는 여전히 상당한 격차로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이번 협상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 하지만 만약 다팔아가 몸집(매출규모)을 1조원까지 키운다면? 이젠 얘기가 달라진다. 절약마트는 다팔아 인수를 통해 단번에 할인점 1위 자리를 꿰차게 된다. 일등마트가 1위 자리를 뺏기기 싫다면 어쩔 수 없이 이번 협상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좋은 협상가가 되기 위해선 이처럼 배트나를 끊임없이 '개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난 2006년에 있었던 까르푸 매각 협상은 배트나의 경연장과도 같았다. 업계 2위인 롯데마트에 매각 협상을 벌이던 까르푸는 업계 1위인 이마트를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이기 위해 지방의 할인점들을 대거 인수, 몸집을 불린다. 이마트가 인수하지 않을 수 없는 '볼륨'을 만든 셈이다. 그러나 까르푸에 끌려가던 이마트는 이에 질세라 월마트라는 새로운 배트나를 찾아낸다. 그리고 월마트 인수를 통해 1, 2위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리고 까르푸가 벌여놓은 판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마트라는 배트나가 사라지자 까르푸는 다시 이랜드라는 배트나를 만들어 롯데마트를 압박했다. 하지만 이마트와의 격차가 벌어진 롯데마트는 까르푸 인수를 포기했고, 까르푸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배트나로 내세운 이랜드에 매각됐다. 청계천 개발 협상도 배트나가 전술적으로 활용됐다. 2002년 서울시는 청계천 개발을 위해 상인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예상대로 협상은 쉽지 않았다. 상인들은 영업 불가에 대한 보상으로 수조원의 권리금을 요구했다. 이에 서울시는 문정동 물류단지에 점포를 제공해 주겠다는 대안을 제시했으나 이 역시 거절당했다. 결국 서울시가 내놓은 배트나는 '청계천 재개발이 불가능하면 (협상이 결렬되면) 청계 고가를 2년간 보수공사 하겠다'는 것. 만약 협상이 결렬돼 보수공사에 들어가면 상인들 입장에선 어차피 2년간 장사를 못하게 된다. 결국 상인들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배트나를 가진 서울시의 의도대로 협상은 타결됐다. 그렇다면 내가 좋은 배트나를 갖고 있을 때 이를 상대에게 알려야 할까, 아니면 알리지 않는 게 좋을까? 협상학에선 '무조건 알리라'고 말한다. 나의 배트나를 상대에게 알리지 않는 것은 전쟁터에 나갈 때 최고의 무기를 창고에 두고 나가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알려야 할까? 다팔아 할인점의 김 전무는 협상 테이블에 앉자마자 일등마트라는 배트나가 있음을 상대에게 '노골적으로' 알렸다. 협상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이는 잘못된 방식이다. 좀더 완곡하게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부드럽게 알리는 것이 협상의 기술이다. 이는 상대와의 관계가 감정적으로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2. 숨은 욕구를 공략하라
좋은 협상가는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방이 제시한 '요구(position)'가 아닌 '욕구(interest)'에 집중한다 (본지 4월12일자 C5면 참조). 이번 협상에서 다팔아의 요구는 최소 1조원의 매각 대금을 달라는 것이고 이런 요구 밑에 깔려 있는 욕구는 경제적 이익을 최대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1조원이 과하다고 판단된다면? 이땐 돈 이외에 상대방에게 숨은 욕구(hidden int erest)가 없는지 찾아봐야 한다.절약마트의 박상박 전무는 다팔아의 회장이 장학사업에 관심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이 박 전무라면 어떻게 이 정보를 활용하겠는가? 박 전무는 다팔아 회장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그의 프레젠테이션은 잔잔하고 감동적인 배경 음악과 함께 작고한 다팔아의 선대 회장이 얼마나 훌륭한 사회사업가였는지를 우선 언급했다. 그리고 만약 절약마트가 다팔아를 인수하면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장학사업을 중단 없이 유지, 발전시키겠다고 약속하고 그 구체적 방안을 설명했다. 작고한 남편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박 전무의 감동적인 말에 다팔아 회장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 들었다. 박 전무가 준비한 비장의 무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경제적 이익 외에도 작고한 남편의 '장학사업을 이어가고 싶다'는 다팔아 회장의 숨은 욕구를 자극한 것이다. 실제로 지난 1월에 있었던 멕시코만 유전인수 협상에 이 같은 협상의 원리가 활용됐다. 당시 석유공사와 삼성물산 컨소시엄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미국 테일러 에너지 사(社)의 유전을 사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 협상에서 한국 컨소시엄은 테일러 에너지의 작고한 전 회장의 자선사업에 대한 의지를 계속 이어갈 것을 협상에서 적극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전 회장의 부인인 현 회장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이처럼 협상에서 상대방의 주요 욕구(main interest·사례에서는 경제적 이익)를 약화시키고 싶다면 상대방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숨은 욕구(hidden interest)를 공략해야 한다. 흔히들 비즈니스 협상에선 경제적 이익 외엔 다른 욕구가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오해다. 사람은 돈 외에도 명예롭고 싶고, 공평하고 싶고, 위험을 무릅쓰기 싫고, 인정받고 싶고, 출세하고 싶고,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수많은 욕구를 갖고 있다. 좋은 협상가란 이런 다양한 인간의 욕구를 파악하고 공략할 줄 아는 사람이다.
3. 객관적 기준(standard)부터 설정하라
다팔아가 제시한 매각대금은 1조원, 절약마트가 제시한 가격은 7000억원. 이런 3000억원의 차이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 협상의 하수들은 이런 상황에선 대충 8500억원 정도에 합의한다. 그리고 만족해 한다. 윈윈 협상을 이뤘다고.하지만 협상 고수들은 절대 이런 식의 숫자 흥정은 하지 않는다. 숫자를 말하기 전에 우선 객관적 기준(standard)부터 설정한다. 숫자를 산정하는 객관적이고 타당한 근거 말이다.거래 업체에 물건을 파는 협상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객관적 기준이 있을까? 원가(原價)나 시장가격, 그 동안 거래했던 가격 등이 기준이 될 수 있다. 박상박 전무는 협상 테이블에서 다팔아를 7000억원에 인수하겠다고 우선 숫자부터 제시했다. 이에 김용호 전무는 최소 1조원은 돼야 한다고 숫자로 맞섰다. 이는 협상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미숙한 행동이다. 만약 김 전무가 이렇게 말하면 어땠을까? "박 전무님, 양측이 원하는 금액을 말하기 전에 기준부터 합의합시다. 제 생각엔 동일한 업종, 비슷한 규모의 상장기업 주가를 기준으로 해서 매각 가격을 결정했으면 합니다. 이 기준에 동의하십니까?"김 전무의 제안에 대해 박 전무는 이렇게 맞받아 칠 수도 있다. "그런 기준도 좋지만, 장부상 총 자산가치 또는 동종 업계 인수 사례를 기준으로 해서 매각 가격을 결정하는 건 어떨까요?"이처럼 협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스탠더드는 여러 개가 있다. 또 '어떤 기준이 가장 합리적이냐'에 대해선 다양한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협상에서 너무도 중요하다. 그 이유는 객관적 기준을 활용해야만 협상이 숫자 게임이 아닌 논리 게임이 되기 때문이다. 논리를 가지고 협상한다는 것은 합리성을 매개로 협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합리성이 기초가 되면 양쪽이 다 납득하기가 쉽고 결과에 승복하기도 쉬워진다. 고려시대 서희는 세치 혀로 강동 6주라는 넓은 땅을 얻었다고 한다. 당신도 비즈니스 세계에서 서희가 될 수 있다. 협상의 '과학적 원리'만 알고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