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정체성까지 뒤흔드는 왜곡된 역사
인간은 독립적인 존엄성과 의식을 지닌 개인이면서,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의 자기 정체성은 사회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사회와 국가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다. 청년들 가운데 90% 이상이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라고 믿는 상황에서 그들이 자신과 나라에 대해 자부심과 애국심을 갖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따라서 청소년들이 애국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와 교육은 물론이고 사회가 공정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개인의 정체성은 주로 청소년기에 형성되기 때문에 청소년기에 어떤 교육을 받는가는 그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자신이 태어난 나라,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인식은 청소년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개인이 자기-존중을 가져야 하듯이, 우리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자기-존중과 국가에 대한 자부심은 자기-개선의 필수 조건이다.”1)라고 하였다. 물론 국가에 대한 과도한 자부심이 호전성과 제국주의를 낳을 수 있듯이, 지나친 자기 존중은 오만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전혀 자기 존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도덕적 용기를 발휘할 수 없으며,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부족하면 국가 정책에 대해 열정적이고 효과적인 토론도 할 수 없다.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이해는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국가 정체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그 사회 구성원이 공동으로 인지할 수 있는 공통의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애국심을 “나라의 기초 이념과 역사에 대한 이해, 동의, 자발적 헌신에 기초해 성립하는 국민적 연대감 혹은 도덕적 책무감”2)으로 이해하면, 이를 함양하기 위해서는 자기 나라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우리 역사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와 교육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근대사에 대한 이해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송건호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자학적 현대사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 글은 8?15가 주어진 타율적 선물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이 강대국에 의해 얼마나 일방적으로 요리되고 혹사당하고 수모 받았으며 이런 틈을 이용해 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시켰는가를 규명하려는 것이다.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자주적이 못 되는 민족은 반드시 사대주의자들의 득세를 가져와 민족윤리와 민족양심을 타락시키고 민족내분을 격화시키고 빈부차를 확대시키며 부패와 독재를 자행하여 민중을 고난의 구렁으로 몰아넣게 마련이다. 민족의 참된 자주성은 광범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되며 바로 이러한 여건 하에서만 민주주의는 꽃피는 것이다.”3)
송건호는 이러한 역사관으로 김성수까지도 비판적으로 평가하였다. 김성수의 이름이 친일단체 에 오르고 부일협력을 하였다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는 김성수가 일제하에서 일제의 지원을 받아 가며 삼양사, 경성방직 등 대기업을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일제의 부탁을 정면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고 본다. 김성수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해방을 위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4)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의 현대사는 '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시킨 역사’라는 부정적 역사관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존재하였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문명사의 대전환’의 과정에서 내외 공산주의 세력의 도전을 물리치고 자유 이념에 입각한 새로운 나라를 세운 역사이며, 정부형태와 개발전략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을 여러 차례로 해소하면서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중진경제와 민주주의를 성취한 역사이다. 한국인의 '나라 만들기’는 1987년에 이르러 일단락을 보았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었다. 국가경제를 선진화하고,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고, 복지국가를 설계해야 했다. 새로운 분열과 갈등의 요소도 잠복해 있었다. 그렇지만 어지간한 내외의 도전에도 잘 넘어지지 않을 국가가 들어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라의 기초로 애국적 국민이, 시민적 중산층이 그런대로 도탑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5)
한국 현대사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노력은 건국과 근대화가 갖는 역사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주로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들은 건국과 근대화를 성공시킨 대통령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의 토대를 놓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역사는 연속의 과정이며, 건국 이전에는 '일제시대’가 엄연히 존재했다. 이 시대는 식민지 시대로 우리에게 나라가 없는 상태였지만, 선각자들은 나라가 없는 나라에서, 나라가 없는 백성들과 함께, '나라 만들기’에 전념하였다. 기업을 통해, 교육을 통해, 언론을 통해 일념으로 '나라 만들기’에 몰입하여 새로운 나라의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우리의 성공적인 건국과 경제 발전의 과정으로서 현대사6) 이면에는 그것을 받쳐준 근대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식은 아직까지는 충분히 확산되지 못하여 일반인의 의식에 주류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1) Richard Rorty, Achieving Our Country, Harvard University Press, p.3. 2)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나라만들기 발자취 1945-1987』, 기파랑, 2013, 16쪽 3) 송건호,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 『해방전후사의 인식』, 1979, 14쪽. 4) 송건호 (1979), 15쪽. 5) 이영훈, 『대한민국의 역사』, 기파랑, 2013, 438쪽.
6) 우리 전통 사회가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1876년부터 일제에서 해방된 1945년까지의 역사를 '근대사’라 하고,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 역사를 '현대사’라고 한다. |
한국의 경제발전은 1960년대에 시작된 것일까?
1960년대 이후 한국은 수십 년에 걸쳐 경제 성장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경제 성장을 통하여 1960년대 초 세계 최빈곤국 가운데 하였던 대한민국은 2010년 이후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 5천 달러를 넘어서고,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놀라운 변신을 하였다. 한국 경제가 1961년부터 35년간 연간 평균 7-8% 고도성장을 거듭한 결과이다. 세계 각국의 국민소득 데이터를 모은 한 자료에 의하면, 1960-2000년의 40년간 한국의 연평균 1인당 GDP 성장률은 6.1%로, 비교가능한 세계 100개 국 중에서 가장 높았다. 이러한 경제 성장은 세계 역사상의 위업이라고 할 수 있다.7)
이러한 위업을 삼성, 현대, LG, SK, 한화와 같은 기업이 독자적으로 이룬 것일까? 이런 기업이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한 '사회적 능력(social capability)’이 존재해 온 것은 아닐까? 1960년대 초 본격적인 공업화를 착수할 무렵 한국의 많은 기업가들이 품고 있었던 야심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 바로 이전에 존재하였던 한국 사회의 활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많은 기업가들을 한꺼번에 배출할 수 있었는가? (중략) 실은 한국에는 엄청난 재능의 보고(寶庫)가 있었던 것이다. 없었다면 그것은 확실히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일단 새로운 사업을 향한 청신호가 떨어지고 기본적인 지원이 제공되자 상황은 완전히 일변했으며, 또 경제가 급속히 성장함으로써 더 많은 인원이 흡수되고 업체도 불어나게 되었다.”8)
여기에서 말하는 '보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김성수ㆍ연수가 세우고 가꾼 경성방직이다. 김성수는 1919년 경성방직을 세워 공업기업가로 변신했으며, 또 일간지 『동아일보』를 발간하고 중앙학교와 보성전문을 인수하여 발전시켰다. 김성수 일가는 제조공업, 언론사업, 교육사업에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여 근대화 사업의 최고봉을 이룩한 것이다. 그들의 작은 시작은 오늘까지 이어져 (주)경방, (주)삼양사, 동아일보사, 중앙중ㆍ고등학교, 고려대학교로 장대한 발전을 이룩하여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춘원 이광수는 1935년에 예언가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업에서 화신(和信), 공업에서 경성방직의 확장ㆍ발전은 결코 한낱 사실만이 아니요, 뒤에 오는 대군(大軍)의 척후(斥候)임이 확실하다.”9)
여기서 '대군’이라 함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끌고 간 기업을 의미한다. 해방과 대한민국이 존재조차 없었던 엄혹한 1930년대에 춘원은 경성방직을 '대군’의 척후로 점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성방직은 깊은 그늘과 파우스트적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는 식민지 유산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식민지 유산에는 독립 운동, 계몽과 진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과 함께 민족적 예속, 수치와 모멸, 변절, 정치적 전제주의와 폭력, 극심한 인간적 고통이 상존하였다. 고창 김씨가와 경성방직은 이러한 식민지 유산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역사적 사례에 해당한다. “경방과 그 운영자들은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과 초기 발전 자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하나의 창을 제공한다. “이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 근대 계급형성과 계급투쟁, 계급과 국가의 상호작용, 전쟁 관련 식민지 공업화와 사회적 동원, 민족주의, 특히 한국인과 일본인 간의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 상호작용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흥미롭고 논쟁적인 문제를 담고 있다.”
대안 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는 경성방직주식회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11)
“1919년 10월 호남의 대지주가 출신 김성수가 주도하여 제1회 납입자본금 25만 원으로 창립한 면방직회사다. 1910년대에 한국에서 소비된 면직물의 4분의 3가량이 일본 제품이었는데, 경성방직이 출범함으로써 면방직 부분에서의 수입대체공업화가 시작되었다.
전국 각지의 지주와 상인 등 유력자가 골고루 자금을 댔고,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경영을 담당하였다. 공장 건립을 준비하던 중, 면제품 투기로 거액의 손실을 내어 좌초 위기에 빠졌으나, 김성수 일가가 추가 자금을 내고 지분을 인수하여 공장을 완성하였다.
조업 초기에는 제품의 낮은 품질과 인지도, 취약한 판매망으로 어려움을 격었다. 이에 조선총독부의 보조금 획득, 동아일보를 통한 물산장려운동에의 적극적인 참여, 지연 면포상 조직을 활용한 판매망 구축 등의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여 곧바로 수익을 내고 설비와 생산을 늘려 갈 수 있었다. 직포만으로는 수익의 획득에 한계가 있어 1935년 방적공장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경성방직도 다른 일본인 대기업처럼 방적부터 직포까지의 일괄 공정을 갖추게 되었다.
전시기에는 원료의 조달에서 제품의 판매에 이르기까지 통제가 심해졌으나, 공정가격이 업체에 유리하게 책정되어 고수익을 올렸다. 전시통제로 사업 확장의 기회가 막히자 이전부터 제품의 중요 수출시장이던 만주로 진출하였다. 1939년 말 남만주방적주식회사를 100% 지분의 자회사로 설립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자본수출이었다. 경성방직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공업이자, 지주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대표적 사례를 이루었다. 그를 통해 양성된 인력은 해방 후 한국 면방직공업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성수는 1917년에 경성직뉴(京城織紐)를 인수하였다. 경성직뉴를 운영하면서 얻은 경영체험과 기술, 인적 자원에 대한 확신을 얻어 '우리도 하면 된다’는 개척자 정신으로 경성방직을 설립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 설립을 계기로 “기업가 정신을 갖고서 시장 기회를 포착하며 생산을 조직하는 존재”12)로서 근대적 기업가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자리 매김 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식산국에 제출한 경성방직주식회사의 '창립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에 있어서의 면포(綿布)의 수용(需用)은 통계가 시사하는 바에 의하면, 연액(年額) 4,200만 원이며 그 중 2,700만 원은 이수입품(移輸入品)에 의존하고 있는 현상이니, 이의 자급을 기도함은 조선 경제독립상 급무라고 할 것이다. 아래에 기명(記名)한 우리들은 이 기운(機運)에 제(際)하여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창설하여, 우선 면직물의 제조를 제1기 기업(起業)으로 하며, 장래 적당한 시기(조선산 면의 성적이 점차 양호하게 됨에 따라)가 도래하면, 구경(究竟)에는 방적(紡績)업무도 겸영(兼營)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조선공업의 발달을 도모하는 동시에 더욱 증산을 도모하고, 자급은 물론 여액(餘額)은 만주지방에도 이출(利出)할 것을 기할 것이며, 더불어 다수의 조선인에게 직업을 주고 공업적 훈련을 하는 동시에 주주의 이익을 희도(希圖)함을 목적으로 동지가 상모(相謀)하여 본사 창립의 허가신청서를 이에 제출하는 바이다.”13)
회사 인가를 받아낸 다음 회사를 설립할 자금을 모집하였다. 당시 김성수 집안의 재력만으로도 회사 설립이 가능하였지만, 민족기업 설립을 염두에 둔 김성수는 '1인 1주’을 전개하여,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지방의 유지들로부터 주금(株金)을 모집하였다.
7) 주익종, 『대군의 척후: 일제하의 경성방직과 김성수ㆍ김연수』, 푸른역사, 2008, 15-16쪽. 8) 워러노프, 『한국경제-인간이 이룩한 기적』, 시사영어사, 1984, 48쪽, 주익종 (2008), 21쪽에서 재인용. 9) 이광수, “실업과 정신수양”, 『조선일보』, 1935년 4월 14일. 주익종 (2008), 5쪽에서 재인용. 10) 카터 J. 에커트, 『제국의 후예: 고창 김씨가와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 기원, 1876-1945』, 주익종 옮김, 푸른역사, 2008, 15-16쪽. 11) 교과서포럼, 『대안 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 기파랑, 2008, 99쪽. 12) 이것은 망뚜의 개념이다. 김종현, 『공업화와 기업가 활동』, 비봉출판사, 1992, 21쪽. 주익종 (2008), 22쪽에서 재인용. 13) 『경방 80년: 1919-1999』, 1999, 48쪽. '창립취지문’은 뒤에 대 국어학자가 된 이희승 선생이 여러 차례 고쳐 썼다. 이희승은 초기 경성방직의 회계업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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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ㆍ김연수 집안의 내력
김성수ㆍ연수(1896-1979) 집안의 본래 본거지는 전라남도 장성이었다. 16세기 호남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하서 김인후(1510-1560)가 그의 조상이다. 그들은 찬란한 조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선대 집안은 풍요롭지는 못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변화가 왔다. 가난한 선비였던 조부 김요협은 고부 지방의 대지주인 정계량의 사위가 되면서 얼마간의 재산을 물려 받았다. 그때 그는 장성을 떠나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김요협은 그 뒤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김요협은 아들을 둘 두었는데 맏이가 김성수의 양부인 김기중이고, 둘째가 김성수ㆍ연수의 친아버지인 김경중이었다.14) 김기중은 천석을 산출하는 땅을 받았고, 김경중은 200석을 추수할 수 있는 땅을 김요협으로부터 받았다.
김기중과 김경중은 “지주제를 발전시켜 나가되, 일정한 범위 내에서 서구 문명을 수용함으로서 자강(自强)과 근대화를 기하고, 반식민지화 상태로부터 국권을 만회하려는 이른바 애국계몽적인 입장에 서는 사람”15)이었다. 이들은 지역의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인 호남학회에 참여하면서 김경중은 『호남학보』의 발간에 참여하였고, 김기중은 줄포에 영신학교를 설립해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인 1921년부터 1936년까지 '민족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순 한문으로 된 『조선역사』를 편찬해 각 향교와 사립학교에 무상으로 기증하였다.
김기중과 김경중은 이재에도 밝아 1910년대를 거치면서 상속받은 유산을 몇 배로 늘렸다. 이 두 형제에 이르러 김 씨 일가는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부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들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는 근검절약이 기여하기는 하였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부를 늘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무역에 뛰어 들었다. 김경중은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면직물과 같은 공산품을 수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뛰어난 사업 감각이었다. 김성수ㆍ김연수 집안이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사업에 성공할 수는 없다. 그들은 지리적 이점과 새로운 시장을 활용할 줄 아는 날카로운 사업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김성수는 변화의 바람을 감지하고 그것을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연결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반 물가가 등귀하여 쌀값이 특히 좋은 시세를 보였다. 이때 선생은 이미 수천 석의 추수를 가지시고 이것을 팔아 다시 토지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건실한 은행에 장기 저축으로 예치시키곤 했다. (중략) 1918년 말경 세계대전이 종결을 고하게 되매 경제계에는 세계적으로 일대 공황이 급습하여 물가가 급전직하로 하락하는 바람에 수많은 거상들이 일시에 문을 닫는 파산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곡물도, 물론 지가도 급격히 하락하였다. 선생께서는 지가가 떨어진 다음에 비로소 토지 구입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곡가 등귀 시에 살 수 있었던 토지의 서너 배, 네댓 배의 많은 농지를 구입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세상 물정을 살피실 줄 아는 선생의 명철한 달관(達觀)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18)
그의 아들 김성수19)와 김연수20)는 경제 발전에 대한 근대적, 민족주의적 사상을 갖고 있었고, 그 사상을 실천할 수 있는 재산과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재산은 선대에 형성한 막대한 유산이었고, 역량은 일본 유학 경험을 통해 습득한 것이었다. 이들 주변에는 문명개화론자, 애국계몽운동세력, 대상인과 지주층,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청년 지식인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민족주의 이념을 가지고 자본주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형 김성수는 경성방직 설립을 주도하였으나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기업 경영을 김연수에게 맡기고 자신을 주로 언론ㆍ교육ㆍ정치 분야에서 활동하였다.21)
14) 김경중은 김성수를 형인 기중의 양자로 보냈다. 15) 역사 학자 김용섭의 서술이다. 16) 뿐만 아니라 지주층은 식민 정책의 보호를 받았다는 분석도 있다. 김제정, “김연수와 토착 자본가들: 민족자본으로 다국적 기업을 세우다”, 『부자의 탄생』, 사람으로 읽는 한국사 기획위원회, 동녘, 2011, 67-69. 17) 김경중으로 추정된다. 지산은 김경중의 호이다. 18) 이희승, “서문”, 『지산유고(芝山遺稿)』, 김제정 앞의 글, 70쪽에서 재인용. 19) 김성수는 장인이 운영하던 창흥의숙과 장평 영학숙(英學塾)에서 근대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1908년 친구 송진우과 함께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세이소쿠 영어학원, 킨죠 중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14년에 귀국했다. 20) 김연수는 1911년 15세에 일본으로 가서 아자부 중학교와 다이산 고등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일본에서 10년 동안 유학했다. 21) 김제정, “김연수와 토착 자본가들: 민족자본으로 다국적 기업을 세우다”, 『부자의 탄생』, 사람으로 읽는 한국사 기획위원회, 동녘, 2011, 61-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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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로서 김성수
김성수ㆍ연수 집안의 재산 형성 과정은 한국 근대 경제사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미곡 무역, 지주 경영, 산업자본으로 전환, 해외 진출 등 각 국면마다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충분히 이용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김성수는 1917년 경영난에 봉착해 있던 경성직뉴주식회사(京城織紐株式會社)를 인수했다. 경성직뉴는 1910년대 조선 직물 산업의 정점으로 실질적인 설립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윤치오의 사촌이자 윤보선의 부친인 윤치소가 초대 사장을 맡았다.
경성직뉴는 1919년 김성수 일가가 경성방직을 설립하기 이전까지 조선인이 설립한 가장 큰 기업 가운데 하나였다. 경성직뉴는 주식회사 형태를 갖춘 직물회사였다. 이 회사는 댕기ㆍ허리띠ㆍ대님 등의 끈 종류를 생산했다. 한복을 입는 사람이 줄면서 수요가 격감하였다.
김성수가 이 회사를 인수하기로 한 것에는 그의 유학시절 친구이자 도쿄고등공업학교 방직과를 졸업한 이강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성수가 인수한 뒤 역직기를 도입하여 소폭 면직물을 생산했으나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김성수는 본격적으로 면직물 생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9년 10월 5일 경성방직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김성수는 초대 사장으로 박영효를 영입했다.
박영효는 김성수를 대신해 총독부 및 금융권과 관계 등 설립 초기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 박영효는 스스로 명목상의 사장으로 자처하면서 경영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회사 실무는 전무 박용희와 지배인 이강현이 담당하였다.
김성수는 1921년 귀국한 김연수에게 회사 운영을 맡겼다. 김연수는 1924년부터 전무직을 맡아 회사 운영에 전념하였다. 전무를 맡은 김연수는 경성직뉴를 고무신 회사로 전환하였다. 당시 고무신 소유가 급증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1926년에는 경성직뉴를 중앙상공 주식회사로 바꾸고, 무역업ㆍ창고업ㆍ광산업 등으로 영업 종목을 확대하였다.
그 당시 일본 자본의 5대 고무제조업체 외에도 대륙 고무, 경성 고무 등 여러업체가 있어서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나가기 위해 중앙상공은 '고무신 품질 6개월 보증판매제’를 영업 전략으로 채택하였다. 6개월 안에 해지면 새 신으로 교환해 준다는 판매 전략이었다. 파격적인 전략에 힘입어 '대륙 고무’를 누르고 1위를 탈환하였다.
경성방직의 난국과 극복
경성방직은 공장이 완공되기도 전에 선물 거래를 하였다가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김씨 일가의 토지를 담보로 한 조선식산은행의 대출과 총독부 보조금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리고 1923년 3월 시운전을 시작하여, 10월에 본격적으로 제품을 생산하였다. 하지만 소비자의 반응은 냉정했다. 소비자의 이런 반응을 두고 김연수는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22)
생산품 판로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눈물겨운 곤란이 잇섯다. (중략) 조선 사람을 본위로 하여 맨든 물건을 조선 사람에게 멸시적 불고(不顧)를 당하게 되니 그 고통이 엇더하엿스라. 그때야말노 자가멸시적(自家蔑視的) 우리 동포의 심정이 몹시도 야속하엿섯다.
당시 시장은 일본산 이입면포가 유행하였고, 일본인 자본이 부산에 세운 조선방직도 기반이 다져진 상태였다. 새로운 시장에 진입한 경성방직은 품질면에서나 가격면에서 이들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고 경성방직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였다.
아직 일본 상품이 미미했던 관서ㆍ관북 등 북한 지역에 진출하였다. 경성방직은 '三星’ '삼각산’, '불로초’, '태극성’ 이란 브랜드 네임으로 상품을 생산하였다. 1926년에 생산을 개시한 '태극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0년대 중후반이 되자 상황이 호전되었다. 경성방직은 그 당시 사회적 정서를 잘 활용하였다. 물론 생산과 판매 전략도 있었겠지만, 민족 감정에 호소하였다. 경성방직은 창립때부터 실력양성론에 입각하여 조선 경제의 자립을 제창하였다.
“조선에 있어서의 면포의 수용은 통계가 제시하는 바에 의하면, 연액 4,200만 원 이며 그중 2,700만 원은 이수입품(移輸入品)에 의존하고 있는 현상이니, 이의 자급을 기도함은 조선 경제독립상 급무라고 하겠다.”23)
경성방직은 '태극성표’ 상표24)를 사용하였는데, 다분히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마케팅 전략이었다. 경성방직은 '백의동포들이여 우리 살림 우리 것으로!’와 같은 광고 카피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경성방직은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는 동양방직ㆍ조선방직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민족 감정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런 마케팅 전략은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나면서 큰 효과를 발휘하였다.
경성방직은 또 총독부의 보조금을 활용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표면상으로는 상업 장려금 명목을 띠고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우리나라의 산업을 감시ㆍ개입하고자 하는 배포가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적절한 판단이 아니다. 경성방직 스스로 요청해서 받은 것이지 총독부가 일방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했던 것은 아니다. 경성방직은 자립단계에 도달한 1934년까지 보조금을 받았다.
경성방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총독부나 금융기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금융기관에서의 대출, 기업 설립의 승인과 함께 원료와 기자재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네트워크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김성수 형제는 처음에 박영효를 선택했다. 그러나 1935년부터는 김연수가 경성방직 사장에 취임하여 직접 이러한 일을 처리하였다. 김성수 형제는 총독부 고위 관리를 지낸 일본인 관료들의 편지를 보면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성수 집안은 경성방직을 운영함으로써 산업자본을 형성하였지만 많은 토지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1919년 이후 일본의 저미가 정책으로 지주 경영의 수익률이 감소하자, 지주 자본의 일부를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면서, 재래의 지주제를 변혁해 이것을 일본인 농업자본가들과 같이 농장제로 개편함으로써 수입 증대를 도모하였다.
세계 공항 속에서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경성방직은 1931년 일본의 만주 진출로 시장 확장의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3월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수립하였다. 만주가 일본의 세력권으로 편입되면서 침체에 빠진 조선 경제를 활력을 찾게 되었다. 경성방직도 이때 일어난 '만주붐’을 잘 타서 크게 이익을 보았다.
경성방직은 방적업을 통해 사업을 확장하였다. 경성방직은 자체 방적 시설이 없어 면사를 일본의 공장에서 수입하였다. 자체 방적을 하지 못하는 경우 생산 원가가 많이 들고 품질 개선에도 한계가 있었다. 자체 방적 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한 경성방직은 1936년 영등포 공장 내에 방적 시설을 만들었다.
경성방직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자신의 제품인 '불노초’의 시장을 만주에서 대륙으로 확대하였다. 1939년에는 만주 최대의 방적회사를 신설을 시작하였다. 경성방직은 1943년에 남만방적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조업에 들어갔다. 경성방직은 “만주에 거주하는 우리 200만 교포의 대표저인 공장을 창설하여 실직자인 교포들의 구제와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만주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공장의 직공 1,200명 가운데 외국인은 한 사람도 없이 조선인만 채용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남만방적은 실패로 끝났다. 해방 직후 만주 투자의 상실과 실패로 퇴진하고 전면적인 경영진 교체를 초래하였다.
22) 김연수, '금일에 이르기까지’, 『신민』 제25호, 1927년 5월 1일. 김재정(2011) 78에서 재인용. 23) '창립취지서’, 김재정(2011) 80쪽에서 재인용. 24) '태극성표’가 상품허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총독부가 아니라 일본 본국의 특허국이 상표 등록 사무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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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삼양사
경성방직을 운영하고, 1924년 삼양사를 창업한 김연수25)는 화신 백화점로 대표되는 박흥식의 상업자본가와 대비되어 산업자본가로 평가된다. 삼양사는 스스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산업자본구조를 확립하여 민족기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삼양사는 과거 90년 동안 지속적인 성장을 이룬 기업, 한국의 장수기업으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기업, 내실경영을 지향하는 사업투자의 모범기업, 사업구조나 영역 등에 있어 점진적 변화를 실현한 기업으로 “한국 기업 경영사에 있어 장수비결을 제시할 수 있는 경영의 성공사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26)
김연수는 전라도 일대에 널리 퍼져 있던 땅을 새로운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1924년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하였다. 1924년 장성농장을 기점으로 1925년에는 줄포 농장을, 1926년에는 고창 농장ㆍ고명 농장ㆍ신태인 농장을, 1931년에는 영광농장을 설립하였다. 1931년에는 삼수사를 삼양사(三養社)로 개칭하였다. 이 가운데 고명 농장은 1929년 2월 중앙고등보통학교 재단 설립기금으로, 신태인 농장은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 인수기금으로 학교법인 중앙학원에 기부했다.
광복 후 산업 자본으로 전환한 후에는 국가적 화두였던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에 화답하기 위해 1950년대에는 수산업과 그룹의 모태가 된 제당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1960년대는 '입는 문제’가 사회적 필요로 부상하자 전주방직을 인수하여 삼양모방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80년에서 1990년대에는 화학 산업에, 1990년대 후반에는 의약ㆍ바이오 산업에 뛰어 들었다. 시대의 필요에 부응하여 사업을 다각화한 것이다. 삼양사는 주위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하기 위해 농업, 제당, 방직, 화학 섬유, 의약, 바이오 분야로 사업 확장을 통해 스스로 진화해 왔다.27)
25) 김연수의 둘째 아들이 김상협이고, 셋째 아들이 김상홍, 다섯째 아들이 김상하이다. 그리고 김상하의 맏 아들이 김원이다. 26) 신유근, 『삼양사 기업경영사 연구: 한국 장수기업의 성공사례』, 서울대학교 경영연구소, 2007, v-vi쪽. 27) 신유근 (200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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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피의자
반민족행위처벌법이 1948년 9월 7일 국회를 통과해 9월 22일 공포되었다. 이 법에 의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설치되었다. 반민특위는 7,000명의 친일파를 반민 피의자로 선정하였다. 1949년 1월 8일 화신 박흥식을 필두로 식민지 시기의 관료와 경제계ㆍ문화계ㆍ종교계 인물이 체포되었다. 김연수는 1949년 1월 21일 반민특위에 연행되었다. 김연수는 임시정부와 이승만, 김규식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학계의 연구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손기정ㆍ남승룡ㆍ서윤복 등 대한마라톤 보급회 인사들과 이승기 서울 공대 학장을 비롯해 서울대 교수들과 섬유산업 관계자들은 김연수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면서 재판부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과 같은 정치적 격동기를 거치면서 반민특위도 격량에 휩싸였다. 이 와중에 검찰은 1949년 6월 15일 피고 김연수에 대해 공민권 정지 15년, 4분의 3의 재산 몰수를 구형했으나, 8월 6일 재판부는 무죄를 판결했다. 재판부는 김연수에 대한 공소사실이 모두 피고 김연수의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정치적 탄압과 사회적 압박으로 인해 저항하기 어려운 주위 사정에서 불가피하게 취한 행동임을 인정했다. 뿐만 아니라 김연수가 중앙학원, 고려대학교 기타 사회학생단체에 대한 막대한 물적 제공을 했고, 금융ㆍ제사ㆍ정미ㆍ농사 및 상공관계 회사를 설립하여 산업을 일으킨 선구자임을 인정하여 공죄상쇄(功罪相殺)에 입각하여 무죄를 언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죄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김연수는 결국 다시 기업의 경영자로 복귀하였다.
김연수는 1945년 12월 경성방직 사장직에서 불러났다. 1958년 보유하고 있던 주식도 전부 매각하였다. 이후 경성방직은 매제인 김용완이 경영하게 되었다. 김연수는 삼양사를 근대 기업으로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1951년 식품공업과 섬유공업으로 사업 방향을 설정하였다. 울산에 제당 공장과 한천 제조 공장을 세웠다. 이후 여러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김연수는 제2공화국 때인 1961년 1월 10일 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경성방직은 '제국의 후예’인가 '대군의 척후’인가28)
이영훈은 일제강점기의 고창 김씨가의 김성수와 김연수에 대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적 대기업의 면모로 성공 사례를 보였을 뿐 아니라, 최초의 기업집단, 나아가 최초의 국제자본으로서 선구를 이루었다.”고 평가하면서 고창 김씨가의 기업 활동이 지니는 경제사적 의의에 관한 조기준29) 김용섭30), 카터 에커트31), 주익종32)의 연구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33)
조기준은 경성방직을 민족기업으로 설정하고, 경성방직이 민족기업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창설자 김성수가 기업 창설의 기본 동기를 근대화 내지 실력 양성이라는 민족주의에 둔 것, 한국인의 기호에 맞는 상품을 개발하고 대중의 민족주의 감정에 호소한 판매 전략을 채택하고 물산장려운동에 적극 참가한 것, 동아일보를 통하여 총독부의 산업정책을 비판함으로써 적지 않은 규모의 보조금을 타낸 것을 들었다.34)
그러나 경성방직이 '민족기업’이었다는 주장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김용섭은 경성방직이 보조금을 지급하고 물산장려운동을 지원까지 한 총독부의 지배정책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을 지적하면서, 김씨가의 민족주의가 타협적인 자치운동으로 변질되어갔다고 비판하였다. 곧 반봉건 지주제를 기축으로 하는 식민지 지배체제와 타협하고, 체제화했기 때문에 민족독립운동에서 맡은 역할이 근본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35)
김용섭의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에커트는 경성방직에 투자한 주주들이 한국인만은 아니었고, 일제강점기 후기로 갈수록 적지 않은 일본인이 참여했음을 밝히면서 경성방직을 '제국의 후예’라고 하였다. 경성방직과 고정적인 거래관계를 맺은 많은 일본인 은행과 회사가 경성방직에 투자했으며, 이사 또는 감사의 직을 맡기도 했고, 경성방직 또한 그들 은행과 회사에 투자하고 이사진에 참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곧 에커트는 경성방직이 민족자본으로 경영되었다는 조기준의 주장을 일축한 것이다. 그는 경성방직의 일본 은행 및 회사와 얽힌 관계를 가리켜 경성방직이 식민지적으로 만개한 회사로서 식산은행 왕국의 일원이었다고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만약 총독부의 보조금이 없었더라면 경성방직은 초기 존속기간 1920년대의 손실을 감당할 수 없어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커트에 따르면 경성방직은 이 같은 구조의 식민지 자본주의가 제공한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한, 식민지적으로 만개한 회사였다. 경성방직은 식민지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거나 대립한 민족기업이 아니라 식민지 권력의 품에 확고하게 안긴 상태에서 성장한, 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통제 하에 있는 '준공기업’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다.36)
그러나 김용섭이나 에커트의 평가와 달리 주익종은 경성방직을 '대군의 척후’로 평가한다. 주익종에 따르면 경성방직은 몇 가지 특별한 경영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산 수입품과 일본 대기업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지적한 경영 능력은 다음과 같다.37)
첫째는 확고한 사업 의지다. 김성수가 경성방직을 창립한 것은 개인의 경제적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경제의 자립을 추구해서였다. 창업자의 이 같은 정신적 지향은 창업과정에서뿐 아니라 창업 직후 선물시장에의 서투른 투자로 도산의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 한 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김성수가 가산을 담보로 은행 차입을 결행한 것이나 주금의 추가 납부를 실행한 것은 민족의 중망(衆望)이 걸린 기업을 도산시킬 수 없다는 대의명분에서였다. 이 같은 창업자의 사업 의지는 경성방직의 다른 임원과 주주에 의해서도 공유되었으며, 제품 개발과 시장 개척에 이르는 경영활동의 세밀한 부분까지 규정했다.
둘째는 기업의 탄탄한 재무구조였다. 초창기에는 대지주 가문이라는 창업자의 개인적 배경이 그 같은 기초를 제공했다. 이후에는 합리적 경영, 적정 수준의 배당, 원활한 차입 등으로 운영자금과 투자자금이 경색된 적이 없었다.
셋째는 자질 면에서 당대 최고의 경영진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경성방직의 임원진은 일본 유학이나 국내 고등교육을 통해 경제학, 정치학, 법학, 공학 전공의 당대 최고의 엘리트 청년들이었다.
넷째, 그들은 선진 기술을 제대로 학습했다. 경성방직은 고등공업학교 출신의 우수한 기술자를 채용했으며, 그들을 일본의 관계 회사에 파견해 연수시켰다. 그 결과 경성방직은 직공 당 직기를 초창기의 1대에서 4대로까지 올리는 생산성의 향상을 이루었다.
다섯째, 그들은 정부에 대한 교섭능력과 사회에 대한 선전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방계 언론사를 통해 총독부의 민족차별정책을 비판함으로써 보조금을 취득했으며, 대중의 민족주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개척했다.
이러한 경영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성방직은 초창기의 도산 위기를 돌파한 위에 1930년대의 호경기를 맞아 생산설비를 확장했으며, 1936년에는 방적공정을 확보함으로써 수익성 면에서 경쟁 상대인 일본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영훈은 경성방직에 대한 주익종의 평가에 동의하면서, 경성방직의 성공을 “시장 환경의 변화에 적응함과 동시에 모험적인 대응을 통해 사업을 확장해간 것은 창업자 형제를 비롯한 경성방직의 경영진이 확보한 위와 같은 특별한 경영능력”에 귀속시켰다. 경성방직의 경영능력과 경영성과를 근거로 '뛰어난 학습자’와 '성공적인 후발자’로 평가한 주익종의 평가를 수용하면서38), 이영훈은 “경성방직의 김성수 형제는 전통경제의 근대적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선구적으로 인도한 '대군(大軍)의 척후(斥候)’로서 곧 20세기 한국 문명사에서 '창조적 소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39)
그들은 기업가 정신으로 기업ㆍ교육ㆍ언론 등과 같은 활동을 통해 나라가 없는 나라에서, 나라가 없는 백성들과 함께, '나라 만들기’에 전념함으로써 광복 후 새로운 나라의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기업가 정신’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지만, 시대 상황에 적응하면서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기업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김성수와 김연수는 한국 근대의 격동기를 살면서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이에 창조적으로 적응하여 오래 살아남은 기업과 학교, 언론사를 남겼다. 그들은 자기 계발과 개조, 기업가 정신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뛰어나게 적응하였다.
그들은 망해가는 조선 말기에 태어나서 기업가적 모험정신과 개척정신으로 일제강점기를 돌파하고 세계 공황, 해방, 건국, 6.25를 통과하면서, 자신들의 기업(起業)을 유지하고 발전시켰다. 그들이 직면한 환경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 사회가 근대적 합리성의 원리에 따라 운영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립자강(自지自强)의 정신으로 광복을 준비한 선각자였다.
28) 이 부분은 이영훈, “토종자본에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한 최초의 근대적 대기업가: 경성방직의 경제사적 의의”, 『자립자강하여야 한다: 인촌 김성수』, 동아일보사, 2011, 118-210쪽에 의존하였다. 29) 조기준, 『한국기업가사』, 박영사, 1973. 30) 김용섭, 한말ㆍ일제하의 지주제-사례4: 고부 김씨가의 지주경영과 자본전환”, 『한국사연구』 19, 1979. 31) 에커트(2008). 32) 주익종, 『대군의 척후: 일제하의 경성방직과 김성수ㆍ김연수』, 푸른역사, 2008. 33) 이영훈 (2011), 188-189쪽. 34) 조기준 (1973), 254, 261-267쪽. 35) 이영훈 (2011), 196-197쪽. 36) 이영훈 (2011), 200-203쪽. 37) 주익종 (2008), 176-177쪽, 이영훈 (2011), 206-208에서 재인용. 38) 이영훈 (2011), 206-208쪽. 39) 이영훈 (2011), 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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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 '한국경영사 자료센터’ 이세인님에게 감사드린다.
신중섭 |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