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 존중하는 나라가 선진국
1997년 10월. 산소 호흡기를 맨 최종현 회장은 청와대를 예방했다. 가쁜 숨을 몰아쉰 최 회장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을 긴급 제안했다. “비상조치를 늦추면 나라경제가 큰일난다”고 강조했다. 금리인하, 5년간 임금동결, 환율 인상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별 말이 없었다. 최 회장은 그해 11월 다시금 산소통을 매고 청와대를 재차 방문했다. 대통령은 경청하지 않았다. 그 후 1개월 후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청와대가 최 회장의 비상조치 건의를 묵살한 것은 조선왕조 600년 이래 내려온 주자학적 사농공상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다. 선비로 통칭되는 청와대관료들의 계급적 우월감과 공상 계급에 대한 하대가 정신적 근저에 깔려있다. “장사치들이 뭘 알아?”라는 관료들의 오만함이 팽배했다. 관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이끌어간다는 한국적 수직적 정경문화의 폐단이 강하게 드러난 사례다.
최 회장은 공익(公益)과 사익(私益)의 조화를 추구한 경세가였다. SK그룹경영에 힘쓰면서도 재계총리로서 국가경제와 국가경쟁력강화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한국정부만큼 재계의 의견을 제대로 수용하지 않는 나라도 드물다. 일본 정부는 재계대표단체인 경단련 회장의 말은 경청해준다. 아베총리도 올 들어 사카키바라 경단련 회장단과 정책 연석회의를 갖고 재계의견을 수렴했다. 한국은 전경련회장이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말을 하면 곧바로 ‘괘씸죄’에 걸린다. 박근혜대통령도 정몽구 현대차 회장 등 30대그룹 회장들을 일제히 불러서 지시와 훈계성 발언을 하곤 한다. 총수들은 면피용 발언을 한마디씩 하고 만다. 대통령과 재계 회장 간에 국정운영과 국가경쟁력 강화방안 등에 대해 활발한 토론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최회장은 95년 3번째 전경련회장 취임 날 대기업규제정책에 대해 글로벌 스탠더드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설화(舌禍)를 겪었다. 김영삼 정부가 소유분산을 통해 경제력집중을 억제하고, 그룹경영의 컨트롤타워인 기획조정실을 해체하는 것을 포함한 경제개혁안을 발표한 직후였다. 최 회장은 “문어발이니 업종전문화정책은 무한경쟁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에디슨이 전구를 만들 때나 하는 이야기라고 소신을 피력했다.
최 회장은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에 대비해 기업과 국가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 회장의 이 같은 쓴 소리는 작은 정부에 대한 강한 소신에서 비롯됐다. 정부는 공정한 경쟁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시시콜콜 업종전문화와 소유분산 문제로 기업에 간섭하고 규제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정부가 산업정책에 대해 일일이 규제를 가하는 것은 기업경쟁력을 훼손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자유와 창의를 기본으로 하는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심각하게 왜곡시킬 것이라고 봤다.
청와대는 난리법석을 피웠다. 한리헌 경제수석은 감히 재계가 정부정책에 대든다며 흥분을 했다. 청와대와 재경부 공정위 국세청은 재벌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데 암묵적인 공조를 취했다. 국세청은 SK그룹에 대한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부당내부거래조사의 칼을 들이댔다. 전방위 보복을 단행한 것이다.
최 회장은 다음날 과천청사 홍재형 부총리 사무실에 찾아갔다. 전날 발언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재계총리가 경제부총리에게 머리를 수그린 것으로 일단락을 맺었다. 사농공상의 계급적 질서는 20세기에도 여전했다. 재계는 그저 정부정책에 고분고분해야 한다는 고압적 집단의식에 관료사회에 팽배했다. 겉으론 최회장의 완패로 끝났다. 정부는 ‘슈퍼갑’이고, 재계는 영원한 ‘슈퍼을’이었다. 갑을관계는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최 회장은 시장경제 주창자였다. 50년대 시장경제의 메카 시카고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시장경제 신봉자가 됐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게리 베커와 동문수학했다. 시카고학풍에 영향을 받은 그는 대한민국이 시장경제를 채택해야만 세계초일류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시장경제원리를 존중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강조했다. 시장경제는 자유기업경제라고 했다. 국가경제가 성장하고, 국민들이 좀 더 잘살기 위해선 기업이 많이 생겨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도 “시장경제의 요체는 정부가 기업에 공갈과 협박을 하지 못하는 경제”라고 했다. 정치가 경제를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경제가 정치를 이끌어가는 체제를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시장경제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이 사유재산권 보장과 사익추구 인정이었다. 기업과 선택의 자유, 경쟁촉진, 시장 그리고 작은 정부도 핵심요소였다. 결국 최 회장이 꿈꾸는 시장경제는 ‘작은 정부, 큰 시장’으로 집약된다.
그는 작은 정부야말로 초일류국가로 가는 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꽃피우기위해선 작은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정부로 가기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부조직을 대폭 축소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공무원 수를 10분의 1로 줄이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정부는 비즈니스를 하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다. 국방 치안 외교 등을 제외하곤 모두 민영에 맡기는 민영화를 단행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정부는 기업 활동에 간여해서도 안 된다는 시각을 견지했다. 정부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소유, 운영 중인 영리단체는 모두 민영화해야 한다고 했다. 공사도 민영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철도 항공항만 해운과 모든 정보 통신 업무, 그리고 우편업무의 상당부분을 민영화해야 한다고 했다.
외환위기 이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한국통신(현 KT),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포스코, 담배인삼공사(KT&G)등을 민영화했다. 반면 좌파 노무현정부와 우파정권인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정부의 공기업 민영화는 중단상태에 있다. 코레일 민영화 논란에서 드러났듯이 노조와 야당의 반발에 부딪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공기업의 비효율적인 경영과 방만 경영, 적자심화 등은 재정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최 회장은 경제전쟁 시대 정부의 주된 기능은 기업을 지원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장경제의 주인공은 기업과 국민이지, 결코 정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관청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은 국민들에게 군림해서 안 된다고 했다. 상품을 팔고 서비스를 한다는 마음자세로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은 정부를 제창한 이유는 무엇인가? 큰 시장, 작은 정부가 가장 능률적이기 때문이다. 공무원 수를 대폭 줄이는 대신 봉급을 4~5배로 올려줘야 한다고 봤다. 클린정부, 공무원사회의 부패를 없애는 데는 경제적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무원이 부패하면 결국 정부의 능률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세제부문의 개혁도 제안했다. 소득세는 누진세를 없애고, 비례세로 해야 한다고 했다. 누진세는 고소득자들의 열심히 일하려는 의욕을 상실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속세도 누진세 대신 단일세율로 가야 한다고 했다. 1세들의 열심히 일하려는 의욕을 좌절시켜선 안 되기 때문이다.
노사문제도 제3의 해법을 제시했다. 회사의 'more work, less pay' 주장과 노조의 'less work, more pay' 요구를 조화시킨 'more work, more pay'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노사화합을 바탕으로 더 많은 이익이 나면 근로자와 경영자가 다 같이 배당을 받는 특별보너스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SK는 이 같은 노사상생으로 인해 다른 기업들에 비해 파업 등 분규가 거의 없다.
국민연금 개혁방안도 눈길을 끈다. 이대로 가면 선진국처럼 국가재정적자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연금제도를 확대하기보다는 연금보험을 민영화하는 방안을 선호했다. 정부의 직접적 보조대상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최근 적자가 심화하는 공무원연금개혁을 추진 중이다. 최 회장은 20여 년 전부터 공무원연금 적자의 심각성을 꿰뚫어보고 선제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최 회장은 한국을 세계일등국가로 만드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전략이 무엇일까에 골몰했다. 한국경제연구원 박사들과 세계일등 국가 전략에 대해 수많은 토의를 했다. 93년 전경련 회장취임이후 국가경쟁력강화를 위한 보고서를 만들어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경제학의 한국화>
최 회장은 대한민국을 초일류선진국으로 만드는 데 강한 열정을 가졌다. 1인당 국민소득 6만 달러를 달성하는 비전을 제시했다. 98년 죽음을 눈앞에 둔 폐암말기 투병 속에도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을 낼 정도였다.
자유기업센터 설립 등 한국의 헤리티지재단 꿈꾸다
최 회장은 한국의 헤리티지 재단을 만드는데 열정을 쏟았다. 헤리티지재단은 미국 공화당의 싱크탱크이자, 작은 정부, 큰 시장의 시장경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세계적인 연구소로 정평이 나있다. 그는 한국에도 자유주의 시장경제 이데올로기를 체계화하고, 확산시키는 핵심 연구기관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 첫 결실은 자유기업센터의 설립이었다. 전경련이 수백억 원의 기금을 출연해 자유기업센터를 발족시켰다. 자유기업센터는 아담 스미스, 프리드리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 자유주의 시장경제학파의 명저 발간을 주도했다. 자유기업센터는 그 후 자유기업원을 거쳐 자유경제원으로 바뀌었다. 자유경제원은 현재 반시장적 경제민주화와 분배 평등 형평의 사회민주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학의 한국화를 추진한 것은 최 회장의 또 다른 업적이다. 초일류 선진국으로 가기위해선 한국적 현실에 맞는 경제학의 정립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미식 경제학은 한국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봤다. 그가 생존할 때 선진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평균 3만 달러였다. 그는 한국이 서구를 단순히 추종하려면 영미식 경제이론과 모델을 그대로 따라 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서구선진국보다 국민소득이 2~3배나 앞서는 초일류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한국현실에 맞는 기업이론과 경제이론을 수립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가 제시한 초일류 선진 국가는 원숙한 사회, 정신적,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다. 현대의 서양경제이론의 인간관, 기업관, 그리고 국가경제이론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학의 대명사인 폴 새무엘슨 MIT대 교수의 <경제학>을 그대로 답습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첫째, 인간의 마음을 도외시한다. 경제학은 인간에 관한 학문인데도, 많은 경우 수학 및 통계학위주의 논문에 치우쳐 인간의 마음이나 행위를 설명하는 데 소홀했다. 경제의 주체는 사람인데, 사람을 도외시한 경제이론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 서양경제학은 주로 개인주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반면 동아시아는 공동체주의 문화가 발달했다. 지연 학연 혈연 중시하는 문화다.
둘째, 미국 경제학은 내수중시형 경제학이다. 한국은 주력산업이 대부분 수출산업이다. 미국은 수출비중이 매우 낮다. 수출비중이 높기 때문에 환율 이자율에 상관없이 공장을 계속 돌려야 한다. 미국기업들은 내수시장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미국의 경제규모는 2차 대전 이후 전 세계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미국기업의 국제경쟁력은 세계1등이었다. 기업과 산업, 국가경제의 성장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플레와 실업이 주된 관심사였다. 내수시장 중심의 미국식 경제이론은 성장과 무역이 중시되는 한국경제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셋째, 미국경제는 무역적자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미국은 무역적자가 아무리 많아도 문제가 없다. 달러를 찍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무역수지가 중요하다. IMF전 96년에 무역적자가 200억 달러나 됐다. 최 회장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대규모 무역적자는 심각한 경제위기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영미식 경제학에 젖은 한국 관료와 학자들은 이를 무시했다.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만 했다.
넷째, 미국경제학은 정부의 실패보다는 시장의 실패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가상적인 상태에서 시장만이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분석한다. 시장이 작동할 경우 별 문제가 없다. 시장이 잘 작동되지 못하는 경우 정부가 개입하여 어떤 문제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다섯째, 미국경제학은 수학논리를 과신한다. 수학을 통해서는 인간의 경제행위의 양적인 면, 도식화한 것밖에 파악하지 못한다. 경제행위의 정신적인 면, 질적인 면은 제대로 취급하지 않는다.
여섯째, 미국경제학은 중시(中視)경제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미는 국가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매크로(거시)경제학과 개인과 기업을 다루는 마이크로(미시)경제학의 둘로 나눌 뿐이다. 반면 한국은 일본 독일처럼 국가와 기업 사이에 기업그룹이 존재하는 점이 다르다. 한국의 재벌, 일본의 게이레쓰이 대표적이다. 이런 경제단위를 연구하는 것이 중시경제학이다. 미국경제학은 기업그룹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시경제학도 다루지 않는다. 영미경제학에 젖은 경제학자들은 재벌과 기업그룹을 해체의 대상으로 본다.
IMF는 영미식 경제학처방의 대표적인 국제기구다. IMF가 한국의 외환위기 당시 고금리정책과 재정긴축을 요구한 것은 매우 잘못된 정책이었다. 태국 인도네시아에 대한 IMF처방도 문제가 많았다. 이들 나라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시카고스쿨의 통화주의자들이 남미국가(칠레제외)들을 망쳐놓았다고 비판했다.
최 회장은 한국의 경제학 교과서들이 근본 경제문제를 소홀히 했다고 비판했다. 한국은 경제성장을 최우선시해야 한다고 했다. 성장을 바탕으로 분배문제, 국제수지문제, 환경개선 등을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은 경제가 성숙단계에 있고, 제조업경쟁력이 세계최강이다. 미국경제학이 안정과 물가관리에 치중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성장의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점에서 한국에 맞는 경제학모델이 필요하다고 봤다.
최 회장은 전경련회장 시절 정부가 저금리정책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삼 정부는 최회장의 주장과는 반대로 구조조정과 안정 등 총수요억제정책에 치중했다. 김영삼 정부 경제팀과 최회장간에는 성장과 안정을 둘러싸고 근본적인 대립을 보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통화주의자들과 강하게 대립각을 형성했다. 화폐 수량설을 신봉하는 관료와 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80년대 후반 국제수지가 흑자를 기록할 때 정부가 통안증권을 발행해 통화를 흡수한 것은 기업들의 조달 금리를 높여서 기업들의 자금난을 가중시켰다는 최 회장의 지론이었다. 이것이 외환위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최 회장의 경제학의 한국화는 현재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한국경제는 지금 저성장 실업증가, 양극화 및 분배악화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경제가 이들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최 회장의 주장처럼 성장이 우선시돼야 한다. 좌파학자들은 한국경제의 문제가 분배와 형평 등 경제민주화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성장과 효율을 소홀히 하고 평등 분배, 균형개발, 반기업 정책으로 가는 것은 경제를 더욱 침체로 떨어뜨릴 뿐이다.
그의 한국적 현실에 맞는 경제학정립은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한국적 경제학이란 용어자체에 거부감을 보이는 학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의 도래 예견하다
최 회장은 90년대 초반부터 글로벌리제이션(세계화)을 언급했다. 지금은 일상용어가 됐지만, 당시엔 생소한 단어였다. 국내 인사 가운데 세계화시대의 도래를 가장 먼저 예견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수년 후 96년 세계화 선언을 했을 정도로 최 회장의 국제경제흐름을 꿰뚫는 선견지명은 뛰어났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도래를 강조한 것은 기업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이 됐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국가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선 민간주도의 시장경제체체의 확립이 중요하다고 봤다.
최 회장은 93년 전경련 상의 무협 경총 기협중앙회 등 경제5단체가 참여하는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기업경쟁력 대신 국가경쟁력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세계경제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기업만이 아닌 국가경쟁력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경쟁력이 추락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고질적인 병폐인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뜯어고치고, 과감한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경쟁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데 힘썼다.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강해야 하고, 국제경쟁력이 강한 기업이 많아 나와야 국가의 경쟁력도 강하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경쟁력강화를 위해선 대기업과 기업그룹의 역할을 중시했다. 선진국의 대기업과 경쟁하기 위해선 한국에도 대기업이 많아야 했다. 대기업은 수많은 중소기업을 거느리게 된다. 반도체 조선 자동차 대국이 된 것은 대기업과 기업그룹조직에 의한 것이라는 시각을 가졌다.
그는 못사는 나라의 특징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 없다는 점이다. 잘사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강한 기업이 많다.
최회장 주도의 국가경쟁력 강화사업은 우루과이 라운드(UR)타결 등 국제경제환경 변화 속에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혁신과 기업가정신의 아이콘
최 회장은 그룹경영에서 10년, 20년, 30년앞을 내다보는 경영을 했다. 임직원들에게 항상 “10년 뒤에 우리 회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봤습니까?”를 질문했다. 그가 10년 앞을 내다보고 포석을 하는데 세가지 원칙을 지켰다.
첫째, 남들이 하지 않는 사업을 해야 한다. 둘째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셋째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최 회장이 삼성과 LG가 선점한 전자 가전 사업에 뛰어들지 않은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SK텔레콤을 세계적인 통신사로 발전시킨 것은 남들이 하는 가전 사업을 하지 않는 대신 정보통신사업에 한발 먼저 진출해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도전하는 사람만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도전을 통해서 사람은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불굴의 의지를 갖고 담대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위험부담을 안고 신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기업가정신이 어느 기업가보다도 왕성했다.
SK그룹 성장사는 혁신과 도전의 역사였다. 국내 최초로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구축한 것이 대표적이다. 60년대 경쟁사들이 직물생산에 안주하고 있을 때, 폴리에스터원사공장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원사공장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사업이었다. 당시로선 무모하고 불가능한 사업으로 비쳐졌다. 선경직물은 자본금이 5000만원에 불과했다. 원사공장 투자규모는 무려 32억원이나 됐다. 당시 창업주이자 형인 최종건도 동생 최종현의 대담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일본 최고의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을 갖고 있던 데이진과 기술이전 협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투자자금도 데이진 등 일본에서 조달했다.
최 회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일본출장길에 올랐다. 기술을 가진 일본기업들에게 번번이 딱지만 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는 굴하지 않고 일본기업을 끈질기게 설득해 기술을 이전받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대규모 투자자금도 일본거래기업의 지급보증을 통해 해결하는 창의적 경영기법을 선보였다.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만 생산하던 폴리에스터필름 국산화에 나섰다. 숱한 실패와 그룹의 부도 위기 속에서 끝내 성공했다. 당시 국산화에 400억 원이 투입됐다. 회사는 자금난에 빠지고, 고리대의 급전까지 조달했다.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최 회장은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뚝심으로 연구개발진을 격려했다. 국산화개발에 사투를 벌인지 2년 만에 독자적인 기술로 폴리에스터 필름을 개발하는 성공했다.
80년대 유공을 인수한 것도 정경유착 등의 시비가 붙지만, 10년 전부터 철저한 준비를 한 끝에 올린 개가였다. 유공의 매출은 당시 선경그룹의 10배나 컸다. 삼성 현대 등을 제치고 선경이 인수하자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평가가 나왔다. 최 회장은 그전부터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과 끈끈한 인맥을 쌓아 정유 산업 진출에 대비했다. SK는 유공인수로 섬유 원사업체에서 종합 에너지 및 화학기업으로 도약했다. 사세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재계10위로 점프했다.
94년 한국이동통신업을 인수하면서 한국의 정보통신산업을 주도한 것도 10년 앞을 내다본 치밀한 준비가 결실을 맺었다. 당시 인수가격은 시세보다 2000억 원이나 비쌌다. 그룹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사업이라면 인수가격 부담은 중요하지 않았다.
최 회장은 이미 80년대부터 정보통신산업이 미래 핵심 산업이라는 확신을 갖고 관련 조직신설과 투자를 해왔다. 96년엔 이통 업계 세계최초로 CDMA(코드부호다중접속방식) 상용화에 성공했다. 최 회장은 정보통신산업 진출 10년과 이후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재계보다 한발 앞서 준비하고 설계했다.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했기에 세계적인 정보통신기업을 키울 수 있었다.
<최종현 회장 라이프 스토리>
94년 1월 중순. 서울 을지로 SK사옥 최종현 회장 집무실.
“회장님 얼마를 적어내야 할까요”(손길승 SK그룹 경영기획실 사장)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특히 정부가 하는 거면 최대한 비싸게 사세요.”(최종현 SK회장)
손길승 사장은 고민하지 않고 질렀다.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지는 엄청난 액수였다. 예상가격보다 몇 배나 더 됐다. SK는 세간의 특혜시비를 불식시키고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인수가격은 4,271억 원. 한국통신의 한국이통 보유지분 23%인 127만 5000주를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하는 데 쓴 금액이었다.
한국이통주식은 SK가 인수하기 전 한 달 간 매일 상한가를 기록했다. SK는 당시 액면가에 비해 무려 30배를 주고 샀다. 한국이통 인수 당시 임원들은 시가보다 몇 배나 비싸게 주고 사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최 회장은 지금 인수하지 못하면 5년 후에는 5000억 원을 더 줘야 한다고 했다. 10년 안에 1조~2조원의 이익을 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보통신이 향후 유망산업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인수금액에 구애받지 말고 반드시 인수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SK텔레콤은 SK그룹의 주력업종이 됐다. 한국 정보통신산업을 리드하고 있다. 세계IT업계 랭킹도 20위권으로 상승했다. 최 회장은 항상 10년 앞을 내다보고 경영을 했다. 60년대엔 경쟁사들이 직물생산에 주력할 때 폴리에스터 원사업체로 도약했다. 형에 이어 그룹경영권을 이어받은 후 실력을 발휘한 첫 번째 창업이었다.
제2 창업은 정유 사업 진출. 71년 선경석유를 일찌감치 설립한 후 정유 사업 진출을 꿈꿨다. SK는 80년 신군부가 유공을 매각할 때 삼성 현대 대우 상위 재벌들을 제치고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미리 원유도입선과 정유공장 건설 등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올린 개가였다. 결코 특혜로 인수한 것은 아니었다.
70년대엔 선경반도체까지 설립했다. 반도체사업은 접었다. LG와 삼성이 선발로 앞서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들이 하는 사업은 하지 않는다는 게 최 회장의 경영철학이었다. 레드오션은 진출하지 않고, 블루오션에 선발로 진입해서 앞서가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제3 창업은 정보통신사업에 말뚝을 박는 것이었다. 80년대 중반 대한텔레콤을 설립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한국 이통을 인수하기 전 10년 전이었다. SK는 90년 노태우정부가 제2이동통신 사업자선정을 할 때, 포스코 코오롱 동부 동양 쌍용 등 경쟁사들을 압도적 점수 차로 이기고 사업권을 따냈다.
최 회장이 노대통령과 사돈인 것이 특혜설에 휘말렸다. 최 회장은 “저희는 이번 사업자 선정에 정당하게 임했다. 만약 부당한 일이 있었다면 기꺼이 물러날 것이다”고 밝혔다. 근거도 없는 특혜설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여권의 김영삼 대통령 후보도 이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정치권과 언론은 특혜설을 부추기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정부는 일주일 만에 사업자 선정을 취소했다.
최 회장은 제2이통사업을 포기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이통사업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잠시 미룰 뿐이라고 했다. 4년 후 최 회장은 마침내 한국이통을 인수했다. SK텔레콤은 현재 세계 IT업계 20위권 업체로 발돋움했다.
최 회장은 창업주는 아니지만, 창업 1.5세대로 불린다. 73년 창업주인 그의 형 최종건회장이 타계하면서 경영권을 승계했다. 회장취임 이후 에너지 및 화학, 정보통신을 양대 축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재계 10위권의 중견그룹에 불과했던 SK그룹을 타계직전엔 5위 그룹으로 도약시켰다. 현재는 삼성 현대차에 이어 재계3위에 랭크돼 있다.
최 회장의 사업궤적을 보면 80년대까지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수직계열화를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수직일관생산체제 구축은 재계에서 처음 선보인 것으로 재계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90년대 이후는 정보통신과 IT분야 투자에 힘을 쏟았다.
최 회장은 1세대 총수 중에서 드물게 실물경험과 이론을 겸비했다. 50년대 서울대 농대 재학 중 미국 위스콘신대 생화학과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시카고대 경제학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까지 땄다. 대부분 총수들이 국내파나 일본파가 많았던 시기에 일찌감치 미국유학파로 글로벌 경영감각을 선보였다.
그가 그룹경영에 본격 참여한 것은 62년 11월 미국 유학중 급거 귀국하면서부터다. 시카고 대학원 시절 장차 국회의원이 되거나, 언론인으로서 국민들을 계몽하는 칼럼니스트를 꿈꿨다. 부친은 다급하게 빨리 귀국해서 형의 사업을 도우라고 했다. 그는 오자마자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회사는 적자에 허덕였다. 직원들은 몇 달째 월급을 받지 못했다.
그는 미국 유학시절 사귄 미 8군사령부의 장교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얻어 인견사(인조비단용 실) 수입권을 최대한 사들였다. 이게 대박을 쳤다. 미국(미국대외원조처)이 이듬해 원사수입권을 가진 한국회사만 실을 수입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다른 무역상들로부터 사들였던 원사수입권을 이용해 실을 대거 사들여 비싸게 팔았다.
박정희군사정부의 수입 제한 및 수출장려정책도 호기로 작용했다. 나일론실크원단을 홍콩에 대규모로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자금난에 숨통이 트였다. 그가 부임한 지 1년만인 63년에 밀린 빚을 갚았다. 직원들의 임금도 모두 지급하고도 돈이 남았다.
선경직물은 60년대 중반 보유 직기 1천대가 넘는 국내 최대 직물기업으로 도약했다. 그의 다음 도전은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을 짓는 것이었다. 직물은 유행을 타면서 경영부침도 심하지만, 직물의 원료인 원사사업은 부침이 없었다. 하지만 돈과 기술이 문제였다.
일본에서 기술도 들여오고, 자금도 조달해야 했다. 자본금 5000만원에 불과했던 선경직물은 32억 원이나 되는 원사공장투자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형 최종건도 동생의 대담한 구상에 혀를 내둘렀다.
최 회장은 일본으로 날아가 데이진과 기술이전협상을 벌였다. 데이진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한국의 조그만 중견 직물업체가 원사공장을 짓겠다는 것에 대해 신뢰를 하지 않았다. 그는 수십 차례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번번히 고배를 마셨다. 기술 없는 서러움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일본 이토추상사로부터 도요보로부터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 기술이전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 회장은 '노(No)'라고 했다. 도요보기술로는 일류 폴레에스테르원사메이커로 도약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기업은 당장의 오늘보다 내일의 경쟁력을 생각해야 한다는 게 최 회장의 지론이었다.
데이진은 최 회장의 의지와 기업가정신에 감동했다. 마침내 기술이전을 해주기로 합의했다. 투자자금도 데이진의 지급보증과 정부의 수입대체를 위한 외화자금지원으로 해결했다. 직물공장에 이어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까지 가동한 선경직물은 국내 최고의 섬유업체로 발돋움했다.
그의 기업가정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폴리에스터 원사개발에 이어 폴리에스터 필름 국산화에 출사표를 던진 것. 원사 기술이전과정에서 숱한 굴욕과 수모를 당했던 그는 폴리에스터 필름만은 자체기술로 개발하고자 했다. 그룹을 자금난에 빠지게 했던 폴리에스터 필름개발 사업은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연구진을 독려했다. 마침내 연구진은 자체개발에 성공했다. 최회장은 생전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이때를 꼽았다.
80년에는 비디오 테이프도 개발하는 성과를 거뒀다. 미국 3M, 독일 바스프, 일본 소니에 이어 세계 4번째로 이룩한 성과였다. 세계최고를 추구하는 일등주의, 선진국 기업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도전정신,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혁신의 열정이 낳은 귀중한 열매였다.
최 회장은 75년 ‘석유에서 원사’까지 수직계열화를 선언하고 제2창업에 나섰다. 80년 11월 유공을 인수한 것은 SK그룹사에 획기적인 이정표가 됐다. 그룹 사업 구조를 석유에서 원사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70년대 초기부터 정유사업을 추진해왔다. 73년 일본과 합작으로 선경석유를 설립했다. 온산에 하루 15만 배럴의 정유공장을 건립한다는 청사진도 마련했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실력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사우디로부터는 SK가 정유공장을 지으면 원유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최 회장의 정유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갔다. 일본 측이 합작을 포기한데다, 사우디등으로부터 원유 공급전망도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국가에는 원유공급을 중단한다는 선언도 했다. 이후 최 회장은 사우디실력자와 두터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80년 신군부가 들어섰을 때 그의 진가가 드러났다. 사우디정부는 한국에 대한 원유공급을 더 이상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동자부장관은 몇 번이나 사우디로 날아가 당시 야마니 석유상을 만나려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석유공급이 끊길 국가적 위기였다. 신군부도 최 회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사우디정부를 움직여 하루 5만 배럴씩 공급받기로 합의했다. 정부도 못한 일을 최 회장이 사우디왕가와의 탄탄한 인맥을 활용해 성사시킨 것이다.
SK가 유공을 인수한데는 원유도입 능력과 사우디와의 탄탄한 네트워크가 결정적인 밑거름이 됐다. 정경유착으로 유공을 품에 안은 것은 아니었다. 유공은 이후 SK에너지로 상호를 바꾸고 한국을 대표하는 에너지업체로 도약했다.
최 회장이 타계하기 전인 97년 그룹외형은 45조원으로 재계5위였다. 98년 8월 최 회장이 타계한 후 장남 최태원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했다. 최태원 회장은 선친에 이어 에너지화학 및 정보통신을 핵심 축으로 하면서 사업다각화에도 적극 나섰다. 2012년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하는 등 수성에도 성공했다. 2014년 그룹 매출은 142조원으로 삼성 현대차에 이어 재계3위를 차지하고 있다.
최 회장은 단순 사업가라기보다는 보기드믄 경세가였다. SK그룹의 발전만을 꿈꾸지 않았다. 국가발전에 많은 고민을 했다. 전경련회장 시절 국가경쟁력강화에 매진했다. 그룹이 정부의 탄압을 받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을 세계1등 국가로 만들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는 데 힘썼다. 그는 정부에 대한 쓴 소리를 그만하고, 사업에나 신경 쓰라는 부인 고 박계희 여사의 간청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라경제를 위해서라면 내 사업이 타격을 입더라도 나서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그는 죽기직전까지 원고를 썼다. 말기 폐암투병을 하느라 산소 호흡기를 맨 채 <21세기 일등 국가가 되는 길>을 직접 집필했다. 그는 이 땅의 척박한 기업풍토에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기치를 내걸고 우리경제와 기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타계직전 산소통을 매고 청와대를 찾아간 것은 ‘재계총리’로서 국가를 구해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나왔다. 공자가 성인과 충신의 사례로 든 견위수명(見危授命)에 해당한다. 나라가 위태로울 땐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사람이 성인이요, 충신이라고 했다.
SKMS는 최 회장이 70년대 창안한 경영원칙과 가치였다. SKMS는 패기 지식 사교 자세 가정 및 건강관리 등 핵심부문별로 SK맨이 되기 위한 자격요건을 정립했다. 수펙스(SUPEX)는 SKMS를 실천하려는 지침이었다. 수펙스는 인간의 능력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단계를 계속 추구하는 것이다. 수펙스 5단계 추구법도 제시했다. 첫째 회사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파악한다. 둘째 파악한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낸다. 셋째 그 성공요소를 바탕으로 수펙스 목표를 세운다. 넷째 수펙스 목표를 이루는데 장애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한다. 다섯째 패기로 장애를 극복한다.
청년들을 위한 공익사업도 많이 했다. 70~80년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MBC ‘장학퀴즈’는 최 회장이 고등학생들의 면학분위기를 고취하기 위해 그룹차원에서 지원한 인기프로그램이었다. 가정환경이 어렵지만,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장학퀴즈에 참가시켜 장학금을 줬다. 현재는 EBS에서 장학퀴즈를 진행하고 있다. 중국베이징TV는 중국판 장학퀴즈인 ‘SK장웬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이 중국진출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선친 최종현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이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세계최고의 대학을 만들려는 원대한 꿈도 간직하고 있었다. 74년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은 세계적인 학자를 육성하려는 장학 사업에서 비롯됐다. 그의 평생 꿈은 자신이 공부한 미국 시카고대학과 견줄 수 있는 대학원 중심의 대학을 한국에 설립하는 것이었다. 고등교육재단을 통해 세계적으로 탁월한 학자를 키우려 한 것. 해외유학생으로 선발된 학생들에게는 미국 유명대학 등록금 전액과 5년간의 생활비까지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그가 74년 충북 충주시 산척면과 동량면에 있는 헐벗은 인등산을 사들여 가래나무 150만 그루를 심었다. 30년 후 목재를 생산해 장학 사업을 위한 종자돈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는 인재육성에 남다른 열의와 관심을 가진 기업가였다.
이의춘 | 미디어펜 대표